2020년 4월
역대 최악의 유가폭락 사건
“원유 6월물 가격도 마이너스로 갈 것.” (스탠다드차타드)
“앞으로 몇 차례 마이너스 유가가 나와도 놀랍지 않다.” (선물중개업체 ONADA)
* 20일경 5월물 배럴당 -37달러 사태
이것은 수요공급의 원리를 뛰어넘은 사건이다. 전세계의 투기자금이 오일펀드로 쏠렸고 세계에서 가장 큰 오일펀드 USO의 만기 투매가 한가지 원인으로 보인다. 2달 동안 운용총액이 2배 증가해 약 40억달러(5조원가량)까지 커진 USO ETF는 단일펀드가 5월물 서부텍사스 (WTI) 원유의 무려 1/4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국 코덱스 WTI 원유 ETF도 2월 하루 거래량이 10만주 내외였던 것이 4월엔 하루 1억주를 돌파하는 등 비정상적인 투기 양태를 보이고 있다.
이는 실제 원유가 아니라 선물 파생금융상품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페이퍼 마켓'(paper market)의 현상이다. 실거래 가격이 아니라 현물을 인계할 수 없는 선물 트레이더들의 처분 비용에 가깝다.
한국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현 유가 수준은 셰일업체의 손익분기 수준 (배럴당 50달러 안팎)을 밑도는 것은 물론 시추 비용이 들지 않는 기존 유정을 통한 생산비용 배럴당 28달러 안팎조차 하회하는 수준이다. 이미 시추 중인 유정조차 원유를 뽑아 올릴수록 손해가 커지는 상황이다.
쿠싱 재고는 4월 24일 81%까지 채워졌고,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만기가 도래하는 대규모 부채 상환 시기에 파산기업 수가 전례 없이 많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보고서는 "셰일업계 부실이 확대할 경우 대출 비중이 높은 중형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부도 위험이 증대하고 회사채 시장의 신용경색 등으로 자금 조달이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 22일경 6월물 가격 20달러 → 10달러 급락
6월물은 5월물과는 다른 문제다. 수요공급의 불균형은 원래 예견된 일이고, 6월물은 20달러 선에서 납득할만한 가격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완충시켜줄 저장고, 특히 쿠싱 저장소가 부족해지고 원래 기대했던 수요 또한 더욱 줄어들면서 발생한 폭락으로 보인다. 약 8천만 배럴을 저장할 수 있는 쿠싱 저장소는 이미 5500만 배럴이 찼고 예약분까지 더하면 사실상 거의 100% 소진되었다고 한다.
해상에서 운반·저장이 비교적 자유로운 브렌트유보다 육지 저장소를 쓰는 WTI의 가격폭락이 심하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미국 남부 멕시코만에 위치한 국가 전략비축유 저장고의 용량은 약 7억7500만 배럴이지만 현재 미국의 전략비축유 보유량도 6억3500만배럴에 달했다.
저장소가 꽉 차자 유조선 임대료가 치솟고 유조선주 주가도 급등하고 있다. 유조선주 인터내셔널 시웨이즈는 지난 한 달 동안 주가가 50% 넘게 올랐고 프론트라인과 스콜피오 탱커 주가도 각각 67%, 69% 올랐다. 노르웨이 리스타드에너지는 원유 생산속도가 현재 수준으로 유지된다면 저장공간이 4~6주 안에 다 찰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저장소는 이미 거의 풀이고 전세계 저장소도 두달 후면 모두 찬다는 얘기다.
세계 초대형 유조선 (VLCC)는 약 850척이며 이중 통상 25척 정도만 판매될 원유를 200만배럴씩 싣고 있다. 그러나 최근 원유를 선적한 유조선은 125척으로 5배나 늘었났고 사용료는 하루 3만 달러에서 15만달러까지 급등했다. VLCC는 원래 운반용 유조선이고 저장하기 위해서만 배를 이용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최근에는 몇달간 원유를 저장하기 위해 배를 이용하는 계약들이 체결되었다.
최근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유조선에 실려 미국 해안을 떠도는 ‘바다 위의 석유’만 해도 1억6000만 배럴에 이른다. 한 주 만에 두 배로 늘었으며 지난 2월 초 2000만 배럴에서 여덟 배 이상 뛰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에도 해상 유조선 재고는 1억 배럴 내외였다.
원유 저장소와 유조선은 콘탱고가 심할수록 이득을 본다. 차근월물이 최근월물보다 비싸질수록 차근월 거래를 위해 팔지않고 쌓아두기 때문이다.
사우디 MBS와 러시아 푸틴의 기싸움, 한바탕 싸우고 나서 내가 한다면 정말 한다는걸 보여주지 식으로 앞뒤생각없이 질러댄 25% 증산. 그 치킨게임의 결과가 이것이다. 사우디와 러시아는 은근히 이 기회에 1000여개가 넘는 미국 셰일오일 기업들이 아예 파산하길 바랬겠지만 예상 이상으로 유가가 폭락하는 바람에 그 유탄을 자기들도 맞고 있다. 중국, 인도, 유럽 등 석유수입국들이 석유 선적을 일제히 취소하거나 보류했기 때문이다.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쿠웨이트 등 걸프 산유국들은 석유를 팔지 못하면 국가경제와 사회시스템이 운영되지 않는다. 이라크는 국내총생산(GDP)의 65%, 쿠웨이트는 60%, 사우디는 50%가 석유에서 나온다. UAE와 러시아는 GDP의 30%, 노르웨이는 20%, 카자흐스탄과 캐나다·나이지리아는 10% 정도를 석유에 의존한다.
신용평가회사 피치에 따르면 사우디는 유가가 91달러, 오만은 82달러, 아부다비(UAE)는 65달러, 이라크는 60달러, 카타르는 55달러가 돼야 재정 균형을 맞출 수 있다 (IMF 자료로는 사우디 76달러, UAE 69달러, 쿠웨이트 61달러가 재정균형 유가). 생산단가는 낮아도 오일이 국가경제의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캐나다는 60달러, 미국은 48달러대가 돼야 경제가 돌아간다. 러시아는 43달러로 재정을 짰으며 부국 노르웨이조차 브렌트유 값이 27달러 아래로 떨어지면 경제가 흔들릴 수 있다.
국부펀드조차 없는 이라크, 나이지리아나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이란, 베네수엘라는 정부가 식료품과 보조금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면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아무도 모른다.
석유산업 특성상 유가가 추락해도 석유회사들이 당장 생산물량을 줄일 수는 없다. 시설 가동을 멈췄다가는 유정 자체가 막힐 위험이 크고, 마진없이 상품을 넘기는 것보다 비용이 더 소요된다.
미국 에너지주도 유가가 가파르게 하락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S&P 1500 에너지섹터는 1.27T 달러에 이르는 시가총액을 자랑했다. 그러나 최근 폭락으로 시총의 46%가 날아가 버렸고 S&P 1500의 11개 주요 섹터 가운데 가장 작은 부문으로 전락했다. 에너지 섹터는 지수의 2.63%를 차지해 소재 부문의 2.65%에도 밀려났으며 섹터 전체가 마이크로소프트나 애플 시총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기술주 부문은 지수의 약 25%로 S&P 1500에서 가장 큰 섹터가 됐다. 에너지 섹터의 10배에 달한다. 미국 일자리의 6% (1000만명)를 차지하는 석유업계의 위기는 실업난과 소비침체, 은행 신용경색을 가속화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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